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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수집

[문장수집]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_무루

📖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루 - 문장수집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는 모두가 정상으로 여기는 삶에서 비껴 나 현실보다는 이상을 사는 듯한 조금 이상한 사람. 비혼 여성으로, 프리랜서로, 고양이의 집사로, 채식지향주의자로, 그림책 읽는 어른으로 살아가는 저자 무루가 자신의 삶과 그림책을 엮은 첫 에세이다. 그림책은 비교적 단순한 그림과 짧은 글이 만들어내는 작은 목소리로 삶 안팎에 크고 깊은 파장을 일으키곤 한다.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의 안내자이기도 한 그는 한 권의 그림책을 읽는 일을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에 빗댄다. 그때마다 우리의 “세계가 한 칸씩 넓어진다”고 말이다. 이 책은 세계의 언저리를 사는 존재가 ‘이상하고 자유로운’ 자신의 본성대로 살기 위해,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은’ 삶을 완성해 나가기 위해, 그림책을 읽고 부단히 세계를 확장해온 어른의 성장 기록이기도 하다. 그의 지도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세계도 한 칸, 어쩌면 여러 칸쯤 더 넓어진 것만 같다. 선명한 길을 따라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듯 보이는 이가 정작 스스로는 지금도 ‘자라는 중’이라고 말한다. 몇 번이고 ‘태어나는 마음’을 반복하며 여전히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를 수없이 넘나들며 어떤 것은 허물거나 새로 짓기도 하면서 지도를 만들어” 나가는 중이라고 말이다. 그런 그가 그려온 지도는 어떤 모양일까. 음악, 사진, 차, 식물, 온갖 다채로운 ‘구덩이’를 파면서 ‘삽질의 역사’를 써온 무루가 가장 공들여 그린 지도의 한 부분은 책과 글로 채워져 있다. 20대에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30대에는 청소년들과 인문서를 읽고 글을 썼으며, 40대인 지금은 어른들을 대상으로 그림책과 문장 수업을 한다. 가르친 이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독려하며 자신도 그들과 함께 자라난 듯, 스스로 ‘늦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그의 글에는 ‘성장’과 ‘모험’이라는 키워드가 곳곳에 박혀 있다. 이 책은 어른의 삶에 끼어드는 갖가지 ‘변수’ 속에서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들을 발견해 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
무루(박서영)
출판
어크로스
출판일
2020.05.12



p22
이제 나에게 큰소리로 훈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더이상 아이가 아닌데다가, 내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몫의 지혜는 스스로 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나다. 이제는 내가 어떤 순간, 누군가의 앞에서 이기고 싶다. 확신에 차서 내가 맞다고, 내 말을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싶다. 언제 내가 이런 꼰대가 되었나. 식은 땀이 난다. 그래서 주머니에 공깃돌 같은 말 하나를 넣어두었다.
(...)
'진실도 작게 말한다.'
무려 2500년 된 말이다. 목소리가 절로 작아진다.


p30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경험,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 순수한 몰입, 외부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이것이 삽질의 조건이다. 실컷 빠져들만큼 재밌다는 점이 놀이하고도 닮았다.


p31
궁금하면 해본다. 새로운 것이라면 해본다. 망할 것 같아도 일단 해본다. 하다못해 재미라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재미난 것들이 모여 재미난 인생도 될 것이다.


p39
그런 목소리들은 종종 재채기처럼 참지 못하고 밖으로 터 져 나오기도 한다. 그러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모험하는 마음이란 방종을 뜻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아무리 내가 날개 를 달고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도 나는 또한 우물을 파는 어떤 아름다운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이고 내 삶의 일부는 여전히 내가 과거에 파놓은 우물에서 길어 올려지고 있다. 그리고 나를 슬프게 하는 이 사실들은 나에게 안정과 사랑과 평온이 필요한 순간 언제나 예외 없이 나를 지켜준다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


p51
세상의 끝은 어딜까. 지도상의 가장 먼 곳은 아닐 것이다. 세상 끝에는 타인들이 있다. 타인의 마음에 닿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세상 가장 먼 곳까지 가보는 일이다. 우리가 문학을 통해 느끼는 감동의 기저에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이 있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스스로 고독하게 살기를 선택했다.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조금 외롭게 보내고 있다.


p54
내가 누군가에게 준 사랑은 세상을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 온다고 했다. 많은 것들이 그렇게 먼 길로 돌고 돌아 온다고 나는 믿는다. 어떤 사람은 죽는 날까지 세상에 던져놀은 마음을 끝내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은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르는 마음을 선물처럼 받을 수도 있다. 많은 좋은 것들이 먼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온다. 그것들은 나를 통과해 또다시 먼 여행을 떠날 수 있다.


p63
그래도 심란해질 때 <프레드릭>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다. 서로 잠잠히 제 할 일을 하는 들쥐들의 자유로움도, 각자의 노력을 서로 재지 않고 나누는 너른 마음도, 시인이라고 인정해주는 동료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나도 알아"라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프레드릭의 자신감도 좋다.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고, 낯선 것을 포용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어떤 소중하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좋다.


p84
아, 이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세계를 함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p85
쉽게 이해받기보다는 오해받아도 좋다는 쪽을 선택하는 종류의 모험가, 나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좋다.



p93
우리는 각자의 풍랑 속에서 자기만의 침식과 퇴적을 거쳐 고유의 화산과 폭포와 계곡을 가지게 된 섬들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시간을 성실히 살아 여기까지 왔고, 보이지 않는 선의 반대편에는 깊게 우거진 숲과 아름다운 강과 비옥한 들을 가지고 있다.



p94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타인이라는 낯선 세계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섬세한 감각이 늘 부족했다. 나는 집 밖에서는 꽤 친절한 사람이었는데 이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놀이룰 하고 잠이 되면 함께 잠드는 동생에게는 늘 인색했다. 나는 못된 언니였던 것이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두 개의 섬 중 하나에는 침엽수를 그리고 다른 한 섬에는 활엽수만 그렸다. 풀의 모양도 두 섬이 각각 다르다. 그것을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여전히 나는 작은 것을 발견하는데에는 소질이 없다. 그래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먼 세계에서 떠밀려 온 저마다의 섬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섬에 아직 내가 찾지 못한 작고 아름다운 것이 숨어있다는 것을. 부디 작은 것들을 지켜주는 신들이 내가 그것을 찾아낼 때까지 떠나지 않고 내 곁에 머물러주기룰 바랄 뿐이다.


p120
그림은 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감정에 닿는다. 설명하는 대 신 보여주기 때문이다. 색, 크기, 음영, 구도, 비율, 질감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온다.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 더 강조되는 방식으로 그래서 그림책은 종종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곤란하 다. 요약하면 한없이 시시해진다. 나를 눈물 쏟게 한 이야기들 조차 그 시시함을 피해 갈 길이 없다. 다 아는 이야기. 어디서 든 한 번은 들어봤던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그림책이라는 제한된 형식 속에서 여전히 새롭게 만들어진다. 시를 닮은 그 림의 언어로.


p124
이 이야기 속에서 경험은 모험과 동의어로 쓰인다.


p126
G씨의 이야기에서도, 샌닥의 이야기에서도 개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개가 내 곁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마음은 나에게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깊고 성숙한 사랑으로 느껴진다.


p127
모험은 내가 아닌 방식으로 나를 살아보는 일이다.


p128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한 번 더 살아볼 수 있다. 혹은 누군가를 한 번 더 살아보게 하거나.



p142
'우리' 밖에 있는 존재들은 쉽게 배척된다.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의 상처나 억울함, 슬픔과 죽음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고려의 대상이 아닐 때가 많다. '우리'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담은 견고하고 높아서 일단 한번 만들어지고 나면 좀처럼 허물 수 없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이다. 누군가 문을 여는 것.


p143
경험은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세계가 한 칸씩 넓어진다. 새로 문이 열리면 세계의 모양도 크기도 달라진다. 열리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세계.



p152
읽고 쓰는 많은 사람들이 '저항'을 판타지 문학의 중요한 속성으로 본다. "뭔가를 단정 짓는 사고 방식에 저항하는 것이야 말로 판타지의 중요한 특성"(가와이 하야오, <판타지 책을 읽는다>)이고, 때로 판타지 소설은 "압제에 저항하는 유용한 도구"(어슐러 르 귄,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가 되기도 한다. 판타지는 무엇도 확신하지 않고, 어떤 것도 단정하지 않으며, 어느 방향으로든 열릴 수 있는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p157
책장을 덮고 나면 알게 된다. 구멍을 만드는 소년은 사실 우리가 버린 어떤 마음이라는 것을.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저 밑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고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살아간다.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가 쉽게 내던지고 외면했던 것들이 있다. 약한 것, 다른 것, 느린 것, 돈이 되지 않는 것, 불편한 것, 나누는 것. 그렇게 뚫린 크고 작은 구멍들이 이제는 거대한 허공처럼 우리가 설 땅을 모두 잠식해 버렸다. 끝내 우리도 함께 떨어져 버리고 말 구멍들을 우리는 계속 만들고 있다.


p161
아무리 발버둥 치고 애써봐여 세계의 모순 속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고, 삶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것이며, 존재의 의미 따위는 없다고 말이다. 1분 40초 짜리의 이 짧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면 기분이 묘하다. 마치 등 뒤로 날아온 종이비행기를 펼쳐 읽은 기분이다. 알지 못했거나 애써 외면했던 허무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 것처럼 발밑이 꺼지는 듯 하다.

#penrose


p163
아마도 어른이 된다는 건 모순과 부조리와 불행의 중력 속에서 힘껏 저항하는 경험을 하나씩 늘려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그럴 수 없는 순간을 맞게 되었을 때는 그것을 잘 감내하는 일이기도 할 테다.


p173
나는 딱 열 살의 깊이만큼만 책을 읽었던 것이다. 아니면 제대로 읽지 않았던가. 아무튼, 이 독서의 시차로 나는 이 책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p174
책을 읽는다는 건 작가의 세계 위에 내 세계를 겹쳐보는 일이다. 어떤 이야기도 읽는 이의 세계를 넘어서지는 못 한다. 내가 읽은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그때의 나만큼만 읽혔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는 동시에 읽는 수만큼의 이야기다. 한 사람이 지나는 삶의 시기마다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읽힌다. 좋은 이야기일수록 더욱 그렇다.


p182
가장 좋은 상태가 되도록 애쓰는 것 보다 어쩌면 지금 여기에 잘 어울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삶의 지혜는 아닐까.



p200
아끼는 마음이 자신을 초과하는 사람.
그래서 타인과 타자에 대해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마음을 나누는 사람.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어린이의 마음속에
또렷한 흔적들 남기는 사람.